HBM전문가 마이크론 이직에 제동 건 법원…中이어 美도 '반도체 두뇌' 타깃 [biz-플러스]
컨텐츠 정보
- 312 조회
- 목록
본문
[서울경제]
SK하이닉스(000660)에서 퇴직한 연구원이 반도체 후발 주자인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로 옮긴 데 대해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특히 해당 직원은 전 세계가 주력하고 있는 인공지능(AI) 서비스의 핵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 전문가라는 점에서 차세대 기술 보호에 비상등이 켜졌다.
7일 법조계와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제50민사부(김상훈 부장판사)는 최근 SK하이닉스가 전직 연구원 A 씨를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A 씨가 이를 위반할 경우 하루에 1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A 씨가 취득한 정보가 유출될 경우 마이크론은 동종 분야에서 SK하이닉스와 동등한 사업 능력을 갖추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반면 SK하이닉스는 그에 관한 경쟁력을 상당 부분 훼손당할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명시했다. 2022년 7월 26일 SK하이닉스에서 퇴사한 A 씨는 메모리연구소 설계팀 주임연구원, D램설계개발사업부 설계팀 선임연구원, HBM사업 수석, HBM 디자인 부서의 프로젝트 설계 총괄 등으로 근무했다. 특히 2015년부터 매년 ‘퇴직 후 2년 동안 동종 업체에 취업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정보 보호 서약서를 작성했다. 퇴직 무렵인 2022년 7월에는 마이크론 등 이직하면 안 되는 기업명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전직 금지 약정서와 함께 국가핵심기술 등의 비밀 유지 서약서도 썼다.
법원이 SK하이닉스가 경쟁사 마이크론으로 이직한 전직 연구원 A 씨를 상대로 낸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지만 한국 반도체 산업을 대상으로 ‘전방위 인재 사냥’이 더욱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는 여전하다. 인공지능(AI) 반도체를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치열해지면서 관련 기술과 인재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미국·유럽까지 인재 유출 경로가 확대된 만큼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가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법원이 SK하이닉스가 제기한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것은 A 씨가 SK하이닉스에서 근무하며 얻은 정보가 마이크론으로 넘어갈 경우 SK하이닉스의 사업 경쟁력 훼손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반도체 개발과 생산성 향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쌓이면서 생기는 경험과 노하우”라며 “이 부분이 경쟁사로 흘러 들어가면 개발 속도나 성공 여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반도체 업계에서는 A 씨가 마이크론으로 적을 옮기면서 SK하이닉스의 D램과 HBM 핵심 기술이 적잖게 마이크론에 흘러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A 씨는 SK하이닉스에서 HBM 사업부 수석, HBM 디자인 부서의 프로젝트 설계 총괄을 맡으며 오랜 기간 HBM 관련 업무를 통솔해왔다. HBM 시장에서 후발주자인 마이크론이 기술 도약을 위한 주요 전략으로 한국 반도체 엘리트 영입을 공격적으로 추진했다는 시각도 있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은 “마이크론이 HBM 기술 확보를 위해 해당 임원을 콕 집어 타깃으로 데려간 것 같다”며 “마이크론은 일본 히로시마에도 공장을 갖고 있어 한국 엔지니어들에게 높은 급여 수당을 제시하며 데려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마이크론이 4세대 HBM을 건너뛰고 곧바로 5세대 양산을 발표했는데 묘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공교롭게 A 씨의 이직 시점 전후로 마이크론은 HBM 사업에서 국내 업체들과 기술 격차 폭을 빠르게 좁혔다. 최근 마이크론이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보다 앞서 5세대 HBM인 ‘HBM3E’ 양산에 착수했다고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마이크론은 과감하게 4세대 제품 개발을 건너뛰고 5세대 양산으로 직행하며 승부수를 띄웠다. AI 반도체 시장의 핵심인 엔비디아가 고객사라고도 공식화했다. 삼성전자는 마이크론 발표 직후 업계 최초로 12단 36기가바이트(GB) HBM3E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히는 등 차세대 개발·양산 경쟁은 하루가 다르게 격화하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HBM 시장은 SK하이닉스(53%)와 삼성전자(38%)가 양분한 가운데 마이크론(9%)이 한 자릿수 점유율로 뒤를 따랐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경쟁 업체로의 핵심 기술 유출이 늘어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영업비밀인 반도체 공장의 설계 도면을 빼내 그대로 본뜬 반도체 공장을 중국에 세우려다 적발됐다.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메스 전 연구원 등은 세메스의 영업기밀을 이용해 반도체 습식 세정 장비를 만들어 수출했다가 적발돼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최근 8년간 적발한 산업기술 해외 유출 사건 165건 중 39건이 반도체에 집중되며 업종 중에서 기술 유출이 가장 심각했다.
인재 유출 범위가 갈수록 광범위해지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과거 국내 반도체 인력 유출의 행선지가 주로 중국이었다면 이제는 미국·유럽 경쟁사까지 대상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크론 외에도 AI 관련 반도체를 자체 개발하는 빅테크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데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 중국 메모리 업체들도 HBM 초기 개발에 뛰어들면서 한국 반도체 인력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대기업 출신 인재를 빼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소재·부품·장비 등 반도체 생태계 전반까지 손을 뻗치고 있어 더욱 위협적이다.
해외 경쟁 업체로의 기술 유출 우려는 커졌지만 형벌 수준은 여전히 느슨하다. 미국이나 대만이 국가 핵심 기술 유출을 중범죄로 보고 대응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처벌이 가볍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총 33건 중 무죄(60.6%)와 집행유예(27.2%)가 전체의 87.8%였다. ‘솜방망이 처벌’이 인재 유출의 허들을 낮추는 근본 이유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 단장은 “경쟁 업체에 이직하는 모든 사례를 제도적으로 막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기술 유출 처벌을 강화하는 것에 더불어 국내 퇴임 임원을 비롯한 기술자들을 국가와 기업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정책을 고안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