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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약왕 동생'이 만든 경성 모던 다방…이상도 단골이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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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상(왼쪽)과 소설가 박태원(가운데), 시인 김소운이 찍은 기념 사진. 당대 유명 예술인인 이들은 매일같이 낙랑파라에 모여 문학과 미술을 논하곤 했다. /연합뉴스
‘고약왕’ 이명래 선생의 아홉 형제 중 우리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이순석 선생, 이명래의 막냇동생이다. 그를 알면 우리나라 근대사의 많은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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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순석하라 이순석(賀羅 李順石·1905~1986)은 이명래의 막냇동생으로 맏형인 이명래와는 15살 차이가 난다. 큰형과의 사이에 형과 누나 7명이 있었다. 9남매라니. 비혼주의자가 넘쳐나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때는 다 그렇게 많이 낳아 키웠다. 이순석의 본명은 평래(平來)인데 아명인 ‘순돌’, 한문 ‘순석(順石)’으로 호적에 올렸다. 어릴 적부터 돌을 가지고 놀던 아이에게 걸맞은 이름이다.

맏형이 신부의 도움으로 종기와 부스럼 치료제 제조법을 전수했다면 막내 순석은 신부의 도움으로 미술의 길에 들어선다. 어릴 적부터 돌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고 그림에 재주가 많은 순석을 눈여겨보던 신부가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스케치와 유화 등 그림을 직접 지도했다.

동생은 형만큼이나 영리했다. 형이 의젓하게 드비즈 신부의 제약 비법을 전수했다면 순석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예술의 분위기에 젖었다. 그림과 공예에 차차 눈떴다. 이명래는 큰 야망을 품고 서울행을 결심한다. 이순석은 형을 따라 1918년, 13세에 충정로로 왔다. 중림동에 약현성당이 있었으니, 종교적 환경은 충남 아산 공세리와 비슷했다.

프랑스 ‘살롱’ 같은 예술인들의 아지트, 낙랑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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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로는 서소문 밖 처형장이자 조선의 내로라하는 순교자들이 배출된 곳이다. 내포 천주교 역사의 뿌리를 이루는 공세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형의 사업을 돕는다. 충정로 명래한의원에서 정신없이 일하면서도 손에서 그림을 놓지 않았던 그. 마침내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1925년 이순석은 일본 도쿄미술학교 도안과에 입학한다. 도쿄미술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비롯해 김관식과 김찬영이 졸업한 학교다. 그는 졸업 후 서울에 돌아와 1932년 7월 7일 경성부청(서울시청) 건너편 장곡천정(소공동) 105번지에 경성 모더니스트들의 모임 장소, 구인회와 목일회 멤버들의 단골집인 낙랑파라(樂浪parlour)를 개업한다. 프랑스의 ‘살롱’과 같이 예술인이 모여 문학과 미술을 논하는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대한문 앞으로 고색창연 옛 궁궐을 끼고 조선호텔 있는 곳으로 오다가 장곡천정 초입에 양제 2층의 소서한 집 한 채가 있다. 입구에는 남양(南洋)에서 이식하여 온 듯이 녹취 흐르는 파초가 놓였고, 실내에 들어서면 대패밥과 백사(白沙)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다가 슈베르트, 데도릿지(독일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등의 예술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좋은 데생도 알맞게 놓여 실내 실외가 조화롭고 그리고 실내에 떠도는 기분이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준다. 이것이 ‘낙랑파라’다.” (박옥화, ‘인테리 청년 성공직업’, 삼천리 193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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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변동림이 처음 만난 낙랑파라 내부. /저자 제공
이순석은 낙랑파라 1층은 다방, 2층은 개인 작업실로 꾸몄다. 당시 사진을 보면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은 내부 인테리어를 확인할 수 있다. 모던경성을 이끄는 대표적인 장소가 됐다. 낙랑파라 뒤에는 화가 구본웅이 운영하는 골동품점이 있어서 이순석과 구본웅, 구본웅의 절친한 시인 이상이 자주 어울렸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등장하는 낙랑파라의 단골손님이 한국 문학사의 이단아 이상이다. 그는 종로에서 제비다방을 폐업하고 금홍이하고도 헤어진 뒤 이곳 출입이 잦았다. 이곳의 지배인 변동욱에게 이상은 “자그마한 키에 지성미가 넘치는 동생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시인 이상과 문학소녀 변동림의 만남이 시작됐다.

둘의 만남은 한국 문예사에 큰 지진과도 같았다. 이화여전을 갓 졸업한 변동림이 나중에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상은 변동림에게 ‘너 나랑 죽을래? 사귈래? 아니면 나랑 살래?’ 하며 청혼했고, 몇 개월 뒤 정릉골짜기 흥천사에서 결혼했다.

이상은 금홍이와 헤어진 뒤 헛헛한 마음에 말이 통하는 모던걸 동림에게 끌렸고, 변동림은 퇴폐적 우수에 가득 찬 이상의 분위기에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들의 만남을 제공한 낙랑파라, 그 다방의 주인이 이순석이니 그것만으로도 이순석은 우리의 일천한 문화사에 이름이 기억될 만하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해태상’도 이순석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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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석이 일본으로 유학할 때 필요했던 돈, 큼지막한 다방 낙랑파라를 개업한 자금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형이 고약을 팔아 번 돈이었을 것이다. 이순석은 다방을 유명 배우 김연실에게 물려줬다. 그리고 중·일 전쟁 시기인 1939년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 충정로에서 형의 사업을 도왔다.

이순석의 활약상은 해방 이후부터다. 국립종합대 내 미술대학안 구상(국대안)에 참여해 1946년 10월부터 서울대 예술대학 도안과 및 응용미술과 교수를 지냈다. 우리나라 도안(디자인)의 선구자로서 그의 미술사적 업적은 대단하다. 한 예로 한국 최고의 훈장인 ‘무궁화 대훈장’도 그가 도안한 것이요, 입법 행정 사법부의 온갖 심벌마크와 휘장을 디자인한 것도 이순석이다. 그리고 서울의 큰 성당들에 그의 그림이 걸려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공예디자인 연구소를 세워 불모지였던 산업디자인 분야를 개척해 수출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1977년 서울 여의도에 신축한 국회의사당 정문 안에 있는 해태상도 이순석 선생의 작품이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당시 자문위원을 맡은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선생은 주장했다. “의사당을 화재에서 예방하려면 해태상을 세워야 합니다. 전에 조선시대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된 뒤 복원공사 때 해태상을 세워 이후 화재를 예방한 바 있습니다.”

해태상 예산 3000만원은 해태를 회사 심벌로 쓰고 있던 해태제과의 박병규 회장에게 협조를 받았다. 이 돈으로 이순석이 국회의사당 앞 두 개의 해태상을 완성했다. 그때 해태상만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해태 기단 공사를 거의 마칠 무렵 박 회장은 ‘좋은 날 술이 있어야 한다’며 해태에서 생산하는 노블와인 백포도주를 가져와 두 개의 해태상 기단 아래 묻었다. 36병씩 총 72병을 묻었고 이것을 국회의사당 준공 100년 뒤인 2075년에 마시기로 했다. 앞으로 51년 남았다. 지금은 국회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회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시대가 아닌가. 앞으로 51년 뒤면 우리 정치는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인 국회의사당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묻혀 있으니 곧 상서로운 바람이 불 것을 기대해 본다.

한이수 도시문화 해설사(NF컨소시엄에이엠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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