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18년간 정보원 심고 감청... 헤즈볼라 최고 수뇌 4명 다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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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의 이슬람 무장 단체 헤즈볼라를 이끌어온 수장(사무총장) 하산 나스랄라(64)가 이스라엘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이스라엘군은 27일 오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외곽 다히예의 헤즈볼라 중앙본부를 겨냥해 대형 벙커버스터(지하로 뚫고 들어가 터지는 폭탄) 등 폭탄 100여 개를 2초 간격으로 투하했고, 나스랄라와 헤즈볼라 남부 사령관 알리 카라키 등이 사망했다고 다음 날 발표했다. 헤즈볼라도 “나스랄라가 순교했다”고 밝히며 그의 사망을 인정했다.
헤즈볼라는 1982년 창설 이후 이스라엘의 숙적인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이스라엘과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다. 2006년엔 전면전도 벌였다.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한 후엔 ‘저항의 축’(이란과 그 지원을 받는 이슬람 무장 세력) 일원으로 가세해 이스라엘 북부를 집중 공격해 왔다. 뉴욕타임스(NYT)는 이스라엘군이 공개한 영상 등을 분석해 “공습에 사용된 전투기 여덟 대에 2000파운드(900㎏)급 BLU-109 벙커버스터 등이 최소 15개 장착되어 있었다. 이번 공격으로 7층 높이 건물 4개 이상이 파괴됐다” 전했다. 이스라엘 군 관계자들은 NYT에 “나스랄라를 죽이기 위해 수분 동안 80개가 넘는 폭탄을 투하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앞서 지난 7월 이란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수도 테헤란을 방문한 하마스의 최고 정치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도 원격 폭발물로 암살했다. 이어 지난 27일까지 나스랄라를 비롯해 헤즈볼라의 최고지도부 네 명을 모두 제거했다. 이에 앞서 레바논 전역에서 헤즈볼라에 보급된 무선 호출기·무전기를 동시다발적으로 원격 폭파시키는 초유의 작전도 단행했다고 알려졌다. 이런 상황을 놓고 ‘이스라엘이 정보전에서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스라엘군은 “정보기관을 통해 (헤즈볼라 지도부의) 행방을 수개월 전부터 실시간으로 추적해 왔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군은 나스랄라가 당시 헤즈볼라 중앙본부 건물 지하 벙커에 주요 지휘관과 함께 은신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공격에 나섰다고 이스라엘 매체들은 전했다. 이스라엘군은 이번 작전을 ‘새로운 질서(New Order)’로 명명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북부를 공격해 많은 이스라엘 피란민이 발생하자 이스라엘은 최근 이들을 귀향시켜야 한다며 헤즈볼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왔다. 지난 17~18일엔 이스라엘의 공작으로 추정되는 무선 호출기·무전기 원격 폭파 공격으로 헤즈볼라 대원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다쳤다. 이후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의 군사 시설을 겨냥해 대대적인 공습을 가했고, 결국 우두머리까지 폭살(爆殺)했다.
‘저항의 축’은 보복을 천명했다. 나스랄라 사망이 전해진 직후 신변 안전을 위해 국내 모처로 대피한 것으로 알려진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특별 성명을 통해 “나스랄라의 죽음을 설욕해야 한다”며 “모든 무슬림(이슬람 신도)은 헤즈볼라를 지원하라”고 촉구했다. 하산 악타리 이란 국제 문제 담당 차관도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레바논에 군대를 파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전면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저항의 축’ 일원인 예멘 무장 단체 후티는 “나스랄라의 후계자들에 의해 성스러운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키며 지상군 투입 준비에도 나섰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자는 누구든 때린다”며 개입 시 공격할 것도 경고했다. 국제사회는 전쟁 발발 1주년을 앞둔 이스라엘이 치밀한 정보력과 끈질긴 집념으로 ‘폭주 기관차’처럼 적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놀라움과 우려 속에 지켜보고 있다.
헤즈볼라를 겨냥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치밀하면서도 집요하게 전개됐다. 지난 7월 말 헤즈볼라 최고 사령관 푸아드 슈크르를 표적 공습으로 암살하고, 이어서 이달 20일 군사 조직의 2인자이자 특수부대 사령관인 이브라힘 아킬 및 고위 지휘관 16명을 역시 정밀 폭격으로 제거했다. 슈크르·아킬, 그리고 남부 지역 사령관 알리 카라키 등 세 명은 하스랄라를 보좌하는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지하드(성전·聖戰) 위원회’의 멤버다. 카라키 또한 27일 이스라엘 폭격으로 나스랄라와 함께 목숨을 잃은 것이 확인됐다. 약 두 달 새 헤즈볼라 최고지도부 전원이 이스라엘 공격에 ‘제거’되면서 조직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놓였다.
창립자 아바스 알무사위가 1992년 이스라엘 헬리콥터의 공습으로 가족과 몰살된 이래, 헤즈볼라 최고지도부는 이스라엘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여 왔다. 이들의 행방은 조직 내에서도 오직 몇몇 사람만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스랄라의 경우 오직 TV 연설을 통해서만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며 철저히 은둔했다. 로이터 등 외신들은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그들이 언제 어디서 만나는지, 또 이들을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제거 작전을 이어 왔다”며 “헤즈볼라 내부가 이스라엘 정보원에게 완전히 뚫렸을 수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정보력을 치밀하게 구축한 것은 2006년 헤즈볼라와의 전면전 당시 얻은 교훈 때문이라고 NYT는 분석했다. 그해 7월 이스라엘은 자국군 병사 두 명이 헤즈볼라에 납치되자 전면 공격을 단행했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상세 전력과 지휘 체계, 작전 방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유엔의 휴전 중재로 한 달여 만에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하는 굴욕을 겪었다. NYT는 “이후 이스라엘은 자국 내 정보기관을 대대적으로 강화하고, 일선 전투 부대 말단까지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할 체계를 구축했다”며 “이스라엘의 최근 성과는 지난 18년간 이런 식으로 축적해 온 정보력과 첨단 기술 덕분”이라고 했다.
이스라엘군과 정보기관들은 현재 헤즈볼라의 통신망에 침투해 있고, 조직 지도부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시스템까지 구축했다고 알려졌다. 그 중심에는 이스라엘군 내에서도 최고 엘리트들이 모이는 것으로 유명한 ‘8200 부대’가 있다. NYT는 “이 부대는 헤즈볼라의 휴대전화와 각종 통신 장비를 감청할 수 있는 최첨단 체계를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엔 각종 해킹 앱과 악성 코드 등 다양한 기술이 동원된다.
8200 부대는 또 이스라엘이 보유한 10여 개의 군사 목적 위성과 첨단 무인기를 동원해 레바논 전역의 헤즈볼라 거점을 지속적으로 감시해 왔다. 다양한 정찰 자산을 통해 쏟아지는 막대한 양의 시각·음성 정보는 1차적으로 AI(인공지능)를 이용해 분석된다. 이스라엘군은 현재 헤즈볼라가 이용하는 건물의 미세한 변화, 또 지휘 체계를 통해 전달되는 사소한 명령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전해졌다. 이러한 첨단 감시 체계는 헤즈볼라뿐만 아니라 하마스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이스라엘이 전쟁 초기부터 하마스 고위 지휘관들을 잇따라 찾아내 저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과의 협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8200 부대는 자체 수집 정보를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공유하면서 미국의 정보도 제공받아 함께 분석하는 등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헤즈볼라와 이란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추적해 왔다고 NYT는 전했다. 이스라엘은 2008년 미국 중앙정보부(CIA)와 협력해 시리아에서 헤즈볼라 최고 간부 이마드 무그니예를 암살했고, 2020년 미군이 이란 혁명수비대의 해외 작전 조직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폭살할 때 핵심 정보를 미국에 넘겼다. 이스라엘은 당시 솔레이마니가 나스랄라를 만난다는 것을 확인하고 두 사람을 모두 제거하는 작전을 검토했으나, 이란과의 전쟁 발발 우려로 이를 포기했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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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