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정부, 김건희 여사 띄워주기 위해 사리구 환수 입장 바꿔”, 이기헌 의원 국감서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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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유출된 후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고려시대의 ‘은제 도금 라마탑형 사리구’ 환수 협의를 진행 중인 국가유산청이 ‘압류 면제’ ‘대여 종료 시 반환’이란 보스턴미술관의 ‘임시 대여 조건’을 수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사리구 안에 있던 사리들은 지난 4월 ‘기증’ 형식을 통해 환수했지만, 정작 사리구는 ‘임시 대여’ 형식으로 국내에 들어올 전망이다. 앞서 국가유산청은 지난 2월 보스턴미술관과 협의를 거쳐 사리는 대한불교조계종에 기증, 사리구는 일정 기간 임시 대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1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이기헌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국가유산청으로부터 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보스턴미술관은 사리 기증 후 진행된 지난 6월 12일 국가유산청과의 사리구 대여 협의과정에서 ‘사리구 압류 면제 및 대여 종료 시 반환에 대한 정부 보증’을 요구했다.
미술관은 “사리구 대여가 실현되길 바라지만 조건이 필요하다”며 압류 면제와 대여 종료 시 반환 조항을 협약문에 명시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압류 면제’는 외국에 있던 한국 문화유산이 한국에 잠시 들어왔을 때 압류나 몰수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다. ‘대여 종료 시 반환’은 대여 기간이 끝날 경우 다시 미술관으로 돌려준다는 의미다.
보스턴미술관의 이같은 대여 조건에 대해 국가유산청은 6월 24일 수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리구의 압류 면제와 대여 종료 시 반환을 정부가 보증한다’는 내용의 조항을 추가한 협약 수정본을 미술관에 전한 것이다. 보스턴미술관은 현재 협약 수정본에 대한 내부 검토를 진행 중이다.
이 의원은 “지난 2월 국가유산청이 사리 반환에 합의했을 당시 문화재계 안팎에선 사리구를 떼어놓고 사리만 환수하는 건 ‘사리·사리구의 일괄 반환’ 입장을 고수해오던 국가유산청이 스스로 원칙을 깬 것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며 “사리구 환수에 대한 정부 입장이 바뀌었다면 이제는 솔직히 밝혀야 한다”고 밝혔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실제 2010년 반환 협상 당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보스턴미술관이 사리 만의 반환을 제안했을 때 “불법 부당하게 반출된 국외소재 우리 문화재는 일부가 아닌 전체가 원 소유국인 대한민국으로 반환되어야 한다”며 “일체형 문화재인 ‘사리구와 사리’를 분리하여 대응할 경우, 정부의 불법 문화재 반환 원칙이 흔들리게 된다”고 밝혔다. 또 “국제사회에서의 문화재 반환 문제는 원칙과 명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보스턴미술관은 사리와 달리 사리구 반환에는 미술관이 불법적으로 취득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했다.
이에 따라 2009년 시작된 사리·사리구 반환 협의는 2013년 이후 사실상 중단됐다. 그러다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 당시 보스턴 미술관을 찾은 김건희 여사가 협의 재개를 제안하면서 협의가 다시 시작됐다.
이 의원은 “김건희 여사의 보스턴미술관 방문 이후 협의가 재개되면서 국가유산청이 10여년 넘게 강경하게 유지해오던 ‘사리·사리구 동시 환수’ 입장을 바꾼 것 아니냐”며 “‘10여년 간 정체돼 있던 사리 환수를 성사시킨 김건희 여사’라는 이미지 띄워주기에 급급해 국가유산청이 사리구에 대한 환수 포기를 공식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국제사회에서 문화재 환수 문제는 원칙과 명분이 중요하다’던 국가유산청이 앞으로 어떻게 문화유산 반환 협상에서 일관성 있게 대응할 수 있겠냐”고 덧붙였다.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구’는 14세기 고려시대 불교미술 금속공예품으로, 뛰어난 조형미는 물론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라마탑형 구조의 사리구는 은으로 제작한뒤 도금했으며, 내부에는 소형의 ‘은제도금 팔각당형 사리구’ 5기가 별도로 또 있다. 사리구 명문에 따르면 석가모니불 5과, 가섭불 2과, 정광불 2과, 지공선사 5과, 나옹선사 5과의 사리를 담았지만 현재는 4과의 사리만 남아 있다.
고려 말기 불교공예의 정수라는 이 사리구는 고려 말 나옹선사의 입적 후 제작돼 양주 회암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됐고, 보스턴미술관은 1939년 일본계 고미술상으로부터 구입했다. 보스턴 미술관도 원래 소장처를 회암사로 추정·기록하고 있다.
도재기 선임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