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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사람이 눈 실컷 보려고 꾸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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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북쪽으로 계속 운전...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 밝아오는 빛을 만나다

이메일이 디지털 사진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진 하단에 사진기와 필름의 종류를 적었습니다. <기자말>

2023년 12월 29일 금요일, 계묘년 마지막이자 갑진년 첫 연휴가 시작되었다(새해가 지난 지 20일도 넘었는데, 왜 갑자기 지난 연말 타령이냐고 물으신다면, 필름 작업에 보름이 걸렸다는 핑계를 대보련다).

3일 이상의 시간이 주어지면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한다. 어느 곳에서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 날씨를 고려하여 동선을 짠다. 이날은 전국적으로 눈과 비가 예보된 상황이었다. 속리산 이남에 머무르면 비가 올 것이요, 그보다 더 북으로 올라가면 눈을 맞을 수 있는 기온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함께 갈 이에게 별다른 설명 없이 단순 명료한 제안을 했다.
 
"강원도 가자!"
"응? 그래. 뭐든 다 좋아요."

 
동행인 역시 언제나처럼 이렇다 할 질문 없이 긍정의 대답을 했고 준비물을 꾸리면서야 하나씩 물어보기 시작했다.
 
원대한 계획은 이랬다. 가장 우선되는 목적은 눈 구경이었다. 전주에서 출발하는 우리는 대둔산을 넘어가는 국도를 타고 금산, 영동, 보은을 거쳐 충주, 영월을 지나 정선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정선읍보다 더 동쪽에 있는 임계로 가서 숙식을 해결하고 눈 구경을 실컷 하기로 했다. 하늘이 허락하면 동해로 넘어가서 새해 첫 해맞이도 덤으로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눈이야 계속해서 내릴 것이었고 고도가 높은 곳의 기온은 영하권에 머물 예정이었기에 고민할 거리가 없었다. 그런데 해맞이가 문제였다. 오히려 내륙은 맑은 하늘이, 동해는 구름이 예보되었다. 며칠 뒤 구름 상황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웹사이트를 방문했다. 낮은 구름이 동쪽 해안에 짙게 깔리는 모습이었지만 해변에서 60km 지점을 넘어서면 그 뒤로 쭉 맑은 하늘이 있었다.
 
지도 웹사이트에 들어가 근처 언덕을 찾아보았다. 해변에서는 수평선이 4km 남짓이라 구름에 가득할 것이지만 250m 정도만 올라가도 수평선이 수십km 바깥으로 멀어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해는 보이지 않을 것이지만 새벽 미명에 양탄자처럼 깔린 구름이 붉게 물든 장면이 혹시나 연출될까 기대하는 마음을 품었다.
 
오랜 운전을 해야 하므로 이틀 밤 모두 차박으로 해결하진 않고 하루는 실내 숙소에서 묵기로 했다. 이 정도면 대단히 편안한 여행이다. 둘 중 하루는 씻을 수도 있고 벽과 천장이 있는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경쾌하게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 목적지로 가는 길 또한 여행이고, 큰 사고에 비교적 안전하기에 먼 거리도 국도를 이용한다.
 
정선이나 평창 정도는 보통 5시간 반을 예상하고 출발한다. 중간에 한 끼 식사를 하게 되면 넉넉하게 7시간을 잡고 간다. 작은 마을이며, 얼마 전과는 또 달라진 산천을 바라본다. 숙소와 식당 모두 조수석에 탄 이가 여정 중에 찾는다. 유명한 관광지는 보통 피해서 가기에 언제나 여유 있다. 그러다가 숙소가 없으면? 그냥 길에서 자면 된다. 차박 여행은 이래서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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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편한 짐 (휴대폰)취사를 하지 않는다면 짐이 매우 적다. 상시 깔려있는 차박 매트, 인버터와 전기장판, 옷과 카메라가 전부다.
ⓒ 안사을

 
거치는 곳이 곧 여행지다

우리에겐 목적지와 기착지가 중요하지 않다. 목적지는 반환점이라는 의미가 더해질 뿐 거쳐가는 곳, 잠시 머무는 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나라 국도와 지방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들이 있다. 누군가에겐 일상일지 모르는 작은 모습들이 모여 우리의 문화를 이룬다.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고있자면 거대한 자연사 박물관의 한 지점에 서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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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 트럭 잔뜩 흐린 하늘, 습기를 머금은 아스팔트, 옥수수 장수 아저씨가 계실까 안 계실까 두근거리는 마음.
ⓒ 안사을

 
중간 식사는 보통 괴산군에서 하게 된다. 전주에서 두 시간 반 정도 걸리니 딱 쉬어가기 좋은 지점이다. 청천면 읍내에서 먹을지 괴산군 소재지에서 먹을지 정하면 된다. 이날은 청천면으로 향했다. 버섯과 올갱이(다슬기) 관련 요리가 많은 곳이다. 특히 이곳은 버섯을 테마로 한 전시관이 있을 정도다.

문 연 식당 중 두세 곳을 골라 인터넷 평점을 비교해 최종 선택을 한다. 대부분 좋은 평점이라 차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갔다. 메뉴를 쓱 보고 보리밥 비빕밥을 시켰다. 한국인, 더구나 전주 사람의 능숙한 솜씨로 된장국 몇 숟가락과 참기름까지 넣고 쓱쓱 비볐다. 그런데 맛이 이상했다.

주인장이 참기름이라고 준 통에는 연한 간장 소스가 담겨 있었다. 말씀드리니 믿기지 않는 표정이시다. 식탁으로 와서 연신 죄송하다고 하시더니, 아내로 보이는 주방에 계신 분께 조심스레 타박을 하신다. 평소 인품이 느껴지는 듯한 착한 말투다.

"아니, 이 사람아. 왜 간장통을 여따가 뒀어..."
"이? 내가요?"


본격적으로 밥을 먹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장님께는 별 문제 없다고 말씀드렸다. 참기름통으로 바꿔만 주시면 잘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니 너무 짰다. 사실 처음에 참기름인 줄 알고 간장을 상당히 넉넉하게 둘렀기 때문이었다. 동행인과 나는 이 상황조차도 재미있어서 킥킥대기만 했다.

"사장님. 아까 사실 간장을 뿌려버렸거든요. 좀 짜서 그런데 맨밥만 한 그릇 더 주실 수 있을까요?"
"아이고, 당연히 그래야지요. 간장을 밥에다 넣어버린 줄은 몰랐네..."


결과적으로는 훈훈하게 한 끼 식사를 잘 마무리 했다. 밥에 들어간 야채도, 장도, 뜨끈하게 끓여 나온 된장국도 모두 맛있었다. 간장 대신 참기름을 옳게 넣은 동행인의 밥과 내 밥은 서로 다른 맛이었지만 간장 소스 자체가 강하지 않고 달큰한 맛이 있어서 그랬는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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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산골 마을 지방도로 여행하는 이유. 이런 소박한 풍경에서 멈춰 설 수 있기 때문에.
ⓒ 안사을

식당을 나와 부지런히 임계면으로 향했다. 아직 4시간 반은 더 가야 하는 긴긴 길이 앞에 있었다. 박달재에 올라서자 진눈깨비가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간간히 차를 멈추고 차가운 공기와 눈을 맞으니 졸음도, 지루함도 없었다. 수도 없이 와 본 곳이지만 눈 내리는 동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일부러 예미리와 고성리를 거쳐 동강을 타고 올라갔다.
 
눈발에 가리어 사진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거친 절벽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가운데 그들을 옆에 끼고 유유히 흐르는 동강은 마치 세밀한 붓으로 그린 수묵화 같았다. 산 사이를 흐르는 강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흔든다. 내가 서 있는 땅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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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이한 터널 차 한 대만 지나갈 수 있는 터널. 선진입 차량 우선이라 눈치게임을 해야 한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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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동강 바닥까지 훤히 보여주며 유유히 흐르던
ⓒ 안사을

 
밤이 되어서야 임계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긴 여정에 수고했다고 삼겹살로 속을 달래고, 오면서 예약해 둔 숙소에 몸을 뉘였다. 연말이고 연휴였지만 사람이 붐비지 않는 산골 마을의 모텔은 추가금도 없이 평소 가격 그대로였다. 덕분에 2박 3일의 신년 여행에서 지출한 숙박비는 총 5만원도 되지 않았다.

눈 구경 후 도착한 묵호항, 해가 아닌 빛을 보러 온 사람들

31일도 계속 눈이 왔다. 동네 강아지마냥 신이 나서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쏘다녔다. 밤이 되기 전에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가까운 골지천 산소길을 지나 사을기마을로 올라가 구미정을 내려다 보았다. 이 계절에는 처음이어서 경치가 새로웠다.

백봉령을 넘어가다 말고 백두대간 수목원에 잠시 들렀다. 일요일이었지만 휴무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무실 앞에 딱 차 한 대가 있었을 뿐이다. 손님이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화장실도 열려 있지 않았다. 눈이 계속 내려서 산책을 하지는 못했지만 눈 구경은 실컷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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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정 사을기마을에서 내려다 본 골지천과 구미정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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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지천 소나무, 안개, 눈, 그리고 계곡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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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 수목원 주차장에서 본 설경
ⓒ 안사을

 
역시 또 밤이 되어서야 묵호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흐린 날씨가 예보되어 해맞이를 온 사람들이 적었을 것이다. 맑은 하늘이었다면 차를 대기 위해 한 시간은 더 돌아야 했을 수도 있다. 작은 회센터로 들어가 먹을 생물을 골랐다. 오징어 회가 갑자기 당겨 활발한 녀석으로 두 마리를 찍었다.

"원래 오징어만 팔지는 않아요."
"아, 그런가요? 그런데 저희가 지금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아서요. 그런데 오징어는 먹고 싶고..."
"우짜겠노. 해 드릴게요."
"우와. 진짜요? 고맙습니다."


하루 장사를 정리하고 있는 판이어서 그랬는지 별 핀잔 없이 귀찮은 요구를 들어주셨다. 차림비를 받고 식탁을 내주는 2층으로 올라가 몇 해만에 오징어 회를 맛나게 먹었다. 아주머니께서 선처를 해 주신 덕에 비싸지 않게 동해안에서 저녁을 해결하게 되어 기분까지 참 좋았다.

잠자리를 잡고 핸드폰 앱으로 구름의 위치를 다시 보았다. 애초의 위치도 사실 아침노을조차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희망을 품어보는 재미로 이곳에 왔던 것인데 다시 고쳐진 구름의 예상 위치는 더 좋지 않았다. 구름을 뚫고 올라가지 않는 한 연한 주황빛마저 기대할 수 없었다.

"내일 아침에 일출은 볼 수 없을 거야."
"괜찮아. 꼭 해를 봐야만 하는 건 아니야. 내일도 모레도 해는 항상 있는 걸."
"그래도 왜 동해로 오고 싶었는 줄 알아?"
"왜 그랬는데?"
"일단 눈 구경을 하고 싶었고, 해는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밝아오는 곳이니 이곳에 있고 싶었어."


알람이 울려 눈을 떴다. 기온이 애매하여 전기장판을 틀지 않았는데 아침까지 푹 잔 걸 보니 잘 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온도계를 보니 바깥공기가 영상 2도였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공기가 매섭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 냄새가 행복하게 코끝을 간지럽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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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을 보러 온 사람들
ⓒ 안사을

 
바깥엔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흐린 하늘에도 모두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요했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문득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진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들은 왜 이곳에 온 것일까. 혹시 모를 한줄기 햇빛을 기대하고 온 것인가? 관습처럼 동쪽으로 온 것인가?

아마도 이들 역시 우리처럼 가장 먼저 밝아오는 빛을 만나기 위해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말갛게 떠오르는 해는 보이지 않을 것이지만 빛은 있을 것이므로. 가장 먼저 밝아오는 곳에 서 있는 것이, 동그란 해를 보는 것만큼이나 큰 의미가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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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빛 해가 아닌 빛을 보러 온 김에, 더 길게 빛을 담아보았다. 장노출 30초.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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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달리 방파제 점점 밝아오는 새해 아침. 30초 장노출.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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