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한국적인 ‘K-아파트’ 탄생기, ‘마포주공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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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주공아파트
박철수|마티|350쪽|2만5000원
1964년 최종 준공된 마포주공아파트는 현대식 아파트 단지의 모형을 만든 곳이다. 수세식 화장실, 현대식 주방 구조, 엘리베이터를 갖추도록 설계됐다. 마포주공아파트 준공 후 사진. 대한주택공사 홍보실·마티 제공
한국의 아파트는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을까. 1962년 7월3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해 완공된 마포주공아파트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기사는 “지금 마포구 도화동에 건설 중인 현대식 6층 고급 ‘아파트’ 6채는 400여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것으로 집 없는 ‘샐러리맨’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기자는 단독주택과 달리 현대식 난방과 수세식 변소, 샤워실이 있다는 점을 짚으며, 9~15평짜리의 이 아파트를 “그리 넓은 집은 못 된다 해도 쓸모 있게 꾸민 고급 ‘아파트’”라고 묘사한다.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다른 점은 ‘어린이놀이터’나 ‘유치원’ 등 공동시설이 있다는 점이라며, 아파트를 “생활 개혁과 공동생활의 훈련을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정의한다.
1960년대 대중에게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공간이었던 아파트. 지금의 한국에선 설명이 필요 없는 제1의 주거형태다. 1970년대 전체 주택 중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0.77%에 불과했고, 단독주택이 95.3%로 대다수였다. 하지만 50년 뒤인 2020년 상황이 역전돼 아파트는 전체 주택의 62.95%를 차지할 만큼 늘어났고, 단독주택 비율은 21%로 쪼그라들었다. 한국에서 이렇게 빠르게 아파트가 늘어난 결정적인 이유는 박정희 정부에서 주거 문제 해결의 가시적인 성공 모델로 아파트 보급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주택건축사 연구자이자 <한국주택 유전자>를 쓴 박철수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는 유작인 <마포주공아파트>에서 한국 아파트 단지의 원형인 마포주공아파트(마포주공)의 시작과 끝을 파헤친다. 그는 25개 장으로 구성된 <한국주택 유전자> 집필 직후 “건축사에 공백으로 남은 주거사를 온전히 채우기 위해” 각각의 장을 심화편으로 쓰고자 했다. 그중 망설임 없이 첫 타자로 꼽은 것이 마포주공이었다. 와병 중이던 저자는 초고를 마무리하고 후반 작업을 출판사 마티의 박정현 편집장에게 맡겼다. 원고는 박 편집장의 손을 거쳐 저자 사망 1년2개월 후 세상에 나왔다.
마포주공의 역사는 5·16 군사쿠데타 직후에 시작된다. 군부는 자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가시적인 성과를 필요로 했다. 새나라자동차 공장, 워커힐호텔 등을 지었지만 공장이나 호텔은 시민들의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건축물이었다. 5·16 쿠데타 주도 세력인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장동운 중령이 대한주택영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마포주공 프로젝트가 빠르게 가동된다.
이전의 아파트는 1938년 준공된 충정아파트처럼 한 동짜리 5층 내외의 집합주택이었다. 장동운은 훨씬 원대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중앙난방을 공급하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10층 규모의 아파트를 ‘단지’로 구성해 1000가구를 수용하는 공간으로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저자는 아파트 자체가 “‘근대문명의 혜택’이었고, 체제 홍보와 대북선전의 장치”였다고 말한다. “중앙집중식 난방에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아파트를 입주자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르고 내리는 장면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릿한 미래 풍경이었다. (…) ‘각종 첨단 설비와 장치’는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매체였다.”
당시 서울 시내에는 1000가구를 수용할 만큼 잘 정비된 부지가 없었다. 하지만 홍보 효과를 위해 사업 부지는 반드시 서울 안에 있어야만 했다. 주택영단은 마포형무소에서 노역장으로 쓰던 채소밭을 급하게 확보해 공사에 들어간다. 이 부지에는 마포형무소 시절 지어진 법무부 관사가 있었다. 관사 입주자들과 퇴거 협의가 제대로 마무리되기도 전에 공사가 시작될 정도로 정부는 급하게 마포주공 건설에 착수했다.
부지는 찾았으나, 당시의 기술력을 감안하면 “최신 설비를 갖춘 10층 아파트 설계는 한국 건축가들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엄덕문 당시 주택영단 건설이사 겸 건축부장은 군사정부의 서슬에도 불구하고 “영단 수준으로는 설계 못한다”는 답을 내놨다고 한다. 하지만 군부에 못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엄덕문은 최고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진, 단 3개월 만에 10층 아파트 설계를 마무리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장동운의 정치적인 발상과 대한주택영단의 전문직 기술관료를 포함한 당대 건축가 집단의 이해가 일치해 만들어낸 산물”이라며 “부족한 물적 토대를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 뛰어넘어 만들어진 모더니티”라고 평한다. 마포주공은 시작부터 그 자체로 “한국 모던의 독특한 특징”이다.
정부는 10층짜리 아파트 계획을 계속 밀어붙였으나, 최종적으로는 6층짜리로 계획이 수정된다. 미국의 반대가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당시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한미경제협력위원회(USOM)는 처음부터 마포주공 건립을 탐탁지 않아했다. 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아파트보다 난민구호주택을 더 많이 지을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또 마포주공 설계 자체가 모든 면에서 미흡하다고 평가하며 사실상 건립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주택영단에 보냈다. 저자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이상을 무리해서 실현시켜줄 이유가 전혀 없었”고, 정부는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와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혁명의 가시화”를 위해 마포주공이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정부는 미국의 지원 없이 예산을 마련해 아파트를 세우기로 한다.
정부가 마포주공아파트의 현대적이고 공동적인 생활양식으로 강조하며 홍보했던 어린이 놀이터. 대한주택공사 홍보실·마티 제공
마포주공 건설과 분양을 맡은 대한주택공사(대한주택영단의 후신)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63년 정부 전체 예산은 768억원이었는데, 하나의 아파트 단지인 마포주공 건립에는 약 5억원이 소요됐다. 주택공사는 초기에 임대아파트로 설정했던 것에서 계획을 변경해 마포주공을 분양하기로 결정했다. 임대로 들어온 입주자들은 갑자기 분양을 받아야 해 큰 경제적 부담을 느꼈다. 6개 동의 주민들이 뭉쳐서 국회와 주택공사 등에 분양가가 너무 높으니, 분양가를 여러 차례에 나눠서 내게 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당시 주택공사 주택연구소 단지연구실장이었던 박병주는 조선일보 기사(1967년 4월16일)에 “‘임대하는 아파트’란 형식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데 있고, 우리의 현실에서 공영임대주택이 성립할 수 없다는 개념을 남기게 되는 결과를 자아내게 하였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고 우려의 의견을 밝혔다.
박병주의 우려는 적중했다. 저자는 마포주공으로 인해 한국의 아파트 건립 방식이 건설비용을 입주자에게 전부 부담시키는 분양 위주의 방식으로 고착됐다는 점을 짚는다. 민간 사업자들은 주택공사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아파트를 지었다. 마포주공의 선례는 주거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도 결정지었다. “지난 세기 한국에서 공공이 저소득층을 위한 공동주택을 공급하고 관리한 시기는 무척 짧았다. 주택은 개인이 구입해야 하는 상품이라는 인식은 굳어졌고, 이후 임대아파트는 분양 아파트 단지의 틈바구니 속에서 저소득층의 남루한 집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정부는 1967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택 부문 정책 목표에 민간 건설을 유도하고, 민간 자금의 극대화를 꾀한다는 내용을 넣는다.
마포주공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주민공동시설이나 편의시설을 아파트 단지 울타리 안에 넣는 단지화 전략을 꾸준히 꾀한다. 정부는 단지 바깥의 간선도로 등 최소한의 도시기반시설만 준비한다. 공원이나 놀이터 같은 여가와 편의시설은 입주자들이 갖추고 관리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것이 단지화된 아파트다. 1978년 준공된 잠실주공아파트는 모든 주민공동시설과 편의시설을 단지 내에 완벽히 갖춤으로써 한국형 아파트 단지의 전형을 완성시켰다.
저자는 “1인당 국민소득과 국가예산이 수십배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는 단지 내 모든 것을 입주자에게 부담시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나날이 심해지는 도시의 사유화와 계급화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여전히 ‘마포아파트 체제’ 속에 있다.”
마포주공아파트. 마티 제공
박철수|마티|350쪽|2만5000원
한국의 아파트는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을까. 1962년 7월3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해 완공된 마포주공아파트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기사는 “지금 마포구 도화동에 건설 중인 현대식 6층 고급 ‘아파트’ 6채는 400여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것으로 집 없는 ‘샐러리맨’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기자는 단독주택과 달리 현대식 난방과 수세식 변소, 샤워실이 있다는 점을 짚으며, 9~15평짜리의 이 아파트를 “그리 넓은 집은 못 된다 해도 쓸모 있게 꾸민 고급 ‘아파트’”라고 묘사한다.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다른 점은 ‘어린이놀이터’나 ‘유치원’ 등 공동시설이 있다는 점이라며, 아파트를 “생활 개혁과 공동생활의 훈련을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정의한다.
1960년대 대중에게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공간이었던 아파트. 지금의 한국에선 설명이 필요 없는 제1의 주거형태다. 1970년대 전체 주택 중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0.77%에 불과했고, 단독주택이 95.3%로 대다수였다. 하지만 50년 뒤인 2020년 상황이 역전돼 아파트는 전체 주택의 62.95%를 차지할 만큼 늘어났고, 단독주택 비율은 21%로 쪼그라들었다. 한국에서 이렇게 빠르게 아파트가 늘어난 결정적인 이유는 박정희 정부에서 주거 문제 해결의 가시적인 성공 모델로 아파트 보급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주택건축사 연구자이자 <한국주택 유전자>를 쓴 박철수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는 유작인 <마포주공아파트>에서 한국 아파트 단지의 원형인 마포주공아파트(마포주공)의 시작과 끝을 파헤친다. 그는 25개 장으로 구성된 <한국주택 유전자> 집필 직후 “건축사에 공백으로 남은 주거사를 온전히 채우기 위해” 각각의 장을 심화편으로 쓰고자 했다. 그중 망설임 없이 첫 타자로 꼽은 것이 마포주공이었다. 와병 중이던 저자는 초고를 마무리하고 후반 작업을 출판사 마티의 박정현 편집장에게 맡겼다. 원고는 박 편집장의 손을 거쳐 저자 사망 1년2개월 후 세상에 나왔다.
마포주공의 역사는 5·16 군사쿠데타 직후에 시작된다. 군부는 자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가시적인 성과를 필요로 했다. 새나라자동차 공장, 워커힐호텔 등을 지었지만 공장이나 호텔은 시민들의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건축물이었다. 5·16 쿠데타 주도 세력인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장동운 중령이 대한주택영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마포주공 프로젝트가 빠르게 가동된다.
이전의 아파트는 1938년 준공된 충정아파트처럼 한 동짜리 5층 내외의 집합주택이었다. 장동운은 훨씬 원대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중앙난방을 공급하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10층 규모의 아파트를 ‘단지’로 구성해 1000가구를 수용하는 공간으로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저자는 아파트 자체가 “‘근대문명의 혜택’이었고, 체제 홍보와 대북선전의 장치”였다고 말한다. “중앙집중식 난방에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아파트를 입주자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르고 내리는 장면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릿한 미래 풍경이었다. (…) ‘각종 첨단 설비와 장치’는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매체였다.”
당시 서울 시내에는 1000가구를 수용할 만큼 잘 정비된 부지가 없었다. 하지만 홍보 효과를 위해 사업 부지는 반드시 서울 안에 있어야만 했다. 주택영단은 마포형무소에서 노역장으로 쓰던 채소밭을 급하게 확보해 공사에 들어간다. 이 부지에는 마포형무소 시절 지어진 법무부 관사가 있었다. 관사 입주자들과 퇴거 협의가 제대로 마무리되기도 전에 공사가 시작될 정도로 정부는 급하게 마포주공 건설에 착수했다.
부지는 찾았으나, 당시의 기술력을 감안하면 “최신 설비를 갖춘 10층 아파트 설계는 한국 건축가들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엄덕문 당시 주택영단 건설이사 겸 건축부장은 군사정부의 서슬에도 불구하고 “영단 수준으로는 설계 못한다”는 답을 내놨다고 한다. 하지만 군부에 못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엄덕문은 최고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진, 단 3개월 만에 10층 아파트 설계를 마무리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장동운의 정치적인 발상과 대한주택영단의 전문직 기술관료를 포함한 당대 건축가 집단의 이해가 일치해 만들어낸 산물”이라며 “부족한 물적 토대를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 뛰어넘어 만들어진 모더니티”라고 평한다. 마포주공은 시작부터 그 자체로 “한국 모던의 독특한 특징”이다.
정부는 10층짜리 아파트 계획을 계속 밀어붙였으나, 최종적으로는 6층짜리로 계획이 수정된다. 미국의 반대가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당시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한미경제협력위원회(USOM)는 처음부터 마포주공 건립을 탐탁지 않아했다. 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아파트보다 난민구호주택을 더 많이 지을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또 마포주공 설계 자체가 모든 면에서 미흡하다고 평가하며 사실상 건립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주택영단에 보냈다. 저자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이상을 무리해서 실현시켜줄 이유가 전혀 없었”고, 정부는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와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혁명의 가시화”를 위해 마포주공이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정부는 미국의 지원 없이 예산을 마련해 아파트를 세우기로 한다.
마포주공 건설과 분양을 맡은 대한주택공사(대한주택영단의 후신)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63년 정부 전체 예산은 768억원이었는데, 하나의 아파트 단지인 마포주공 건립에는 약 5억원이 소요됐다. 주택공사는 초기에 임대아파트로 설정했던 것에서 계획을 변경해 마포주공을 분양하기로 결정했다. 임대로 들어온 입주자들은 갑자기 분양을 받아야 해 큰 경제적 부담을 느꼈다. 6개 동의 주민들이 뭉쳐서 국회와 주택공사 등에 분양가가 너무 높으니, 분양가를 여러 차례에 나눠서 내게 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당시 주택공사 주택연구소 단지연구실장이었던 박병주는 조선일보 기사(1967년 4월16일)에 “‘임대하는 아파트’란 형식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데 있고, 우리의 현실에서 공영임대주택이 성립할 수 없다는 개념을 남기게 되는 결과를 자아내게 하였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고 우려의 의견을 밝혔다.
박병주의 우려는 적중했다. 저자는 마포주공으로 인해 한국의 아파트 건립 방식이 건설비용을 입주자에게 전부 부담시키는 분양 위주의 방식으로 고착됐다는 점을 짚는다. 민간 사업자들은 주택공사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아파트를 지었다. 마포주공의 선례는 주거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도 결정지었다. “지난 세기 한국에서 공공이 저소득층을 위한 공동주택을 공급하고 관리한 시기는 무척 짧았다. 주택은 개인이 구입해야 하는 상품이라는 인식은 굳어졌고, 이후 임대아파트는 분양 아파트 단지의 틈바구니 속에서 저소득층의 남루한 집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정부는 1967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택 부문 정책 목표에 민간 건설을 유도하고, 민간 자금의 극대화를 꾀한다는 내용을 넣는다.
마포주공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주민공동시설이나 편의시설을 아파트 단지 울타리 안에 넣는 단지화 전략을 꾸준히 꾀한다. 정부는 단지 바깥의 간선도로 등 최소한의 도시기반시설만 준비한다. 공원이나 놀이터 같은 여가와 편의시설은 입주자들이 갖추고 관리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것이 단지화된 아파트다. 1978년 준공된 잠실주공아파트는 모든 주민공동시설과 편의시설을 단지 내에 완벽히 갖춤으로써 한국형 아파트 단지의 전형을 완성시켰다.
저자는 “1인당 국민소득과 국가예산이 수십배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는 단지 내 모든 것을 입주자에게 부담시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나날이 심해지는 도시의 사유화와 계급화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여전히 ‘마포아파트 체제’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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